Text 1/홍일점 (完)

[엑소 역하렘 빙의글] 홍일점 15

큥큥 뛰어다녀 2017. 8. 20. 00:10



홍일점













첫째날은 내가 속이 안좋아서 그냥 사뿐하게 지나갔다. 둘째날이 되자마자 한라산을 등반한다니, 이건 말도 안된다. 지금 당장 스케줄을 짠 사람의 멱을 따버리고 싶었지만, 옆에서 계속 등산의 규칙 106가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박찬열 때문에 정신이 너무나도 없었다. 아무한테도 내 숙소 방이 몇 호인지, 박찬열한테 알려주면 안된다고 그렇게 일렀는데 얘는 5분 만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됐다. 



"짝꿍아, 모자 꼭 챙겨. 거기 위에 햇빛 뜨거워서 머리 타."


"산 올라가면 추운 거 아니야?"




"응, 바람은 엄청 부는데 햇빛도 엄청 뜨거워."



오, 몰랐는데. 등산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닌가봐? 이제서야 박찬열이 아까부터 떠들어대던 등산의 규칙 106가지에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오늘 만은 꼭 경수랑 같이 버스에 타야지, 했는데 선생님께서 '번호대로' 앉으시라는 명령이 있었다. 어쩜 이렇게도 신은 나를 괴롭게 만드셨을까. 왜 하필 내 앞번호가 박찬열이죠? 결국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도 경수랑 앉기는 커녕, 내 자리에서 경수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한라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가 정말 등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에는 그냥 가면 되겠지, 그까이꺼 했는데. 1950m나 된다고, 남한에서 제일 크다는 말을 듣자마자 겁쟁이인 나는 겁부터 먹었다. 아, 씨볼... 그냥 휴게소에서 쉬면 안되려나? 



"짝꿍아, 힘들면 내 손 잡고 가도 돼."


"야, 우리 방금 출발했거든?"



열 발자국도 가지 않았는데 힘들면 손 잡고 가도 된다니. 아, 근데 사실 조금씩 힘들어지려고 했다. 아니, 도대체 길은 뭐 이따구로 만들어가지고. 여긴 사람이 갈 수 있는 평범한 길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딴 운동화를 신고 왔을까. 의문이었다. 그래도 캔버스를 신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긴 하지만, 운동화 밑창이 안 떨어지는 게 대단한 것 같다. 


한 1시간 정도 걸었을까,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 아, 난 내가 이렇게 저질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박찬열 이새끼는 계속 손을 잡으라고 손을 내밀지만 여기서부터 힘들다는 걸 티낼 순 없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백록담에 가야만 했다. 이제부터는 오기로라도 가야 했다. 



"와... 여기가 진달래밭 대피소?"


"아니, 여기 속밭 대피소."


"...뭐?! 그럼 아직 한참 남았잖아?!"



첫 대피소에 오자마자 박찬열과 물을 마시면서 등산 코스판을 보고 있는데, 난 당연히 어느 정도 올라온 것 같아서 백록담이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진달래밭 대피소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속밭 대피소라니! 난 믿을 수가 없었다. 다 때려뿌수고 그냥 내려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아보여서 그냥 체념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도 아직 오전이었다... 아직도 오전...


미쳤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신이다, 하고 생각하고 눈 딱 감고 뛰어 올라갈까, 생각해서 뛰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다시 만날 뻔 한 건 정말 팩트다. 결국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 나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다짐했다. 박찬열한테 살짝은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이렇게 혼자서 걸어가다가는 백록담에 내 시체를 뭍고 갈까봐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왜?"


"긴 옷 입어."


"왜? 올라갈 때 땀나잖아."


"햇빛 세서 타잖아."



오, 박찬열... 평소랑 역시 좀 달라보이는 걸?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고 이제 정말 백록담으로 올라가는 길이 확실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좀 전에 왔던 길들보다 훨씬 험해서 정신을 바짝 챙기고 올라가야 한다고 박찬열이 106번 강조했다. 박찬열 덕에 더워죽겠지만 모자를 쓰고, 얇은 외투까지 위에 걸치고 있었다. 아, 정말 안 그래도 6월이라 땀이 줄줄 흐르는데, 얘 말대로 햇빛이 세다보니 암만 바람이 불어도 내 땀의 중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야... 우리 안 올라가면 안돼? 아, 제발... 야, 진짜... 나 진짜 못해."


"아, 짝꿍아. 우리 진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 저기 밧줄 있는 거 안 보여? 저거만 올라가면 끝이야."



무슨 계단이 전세계 인구수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70억 3천7백50만번째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까, 이제 난 끝났구나 하는 절망의 타임이 돌아왔다. 내 앞에 지금 이 인간이 박찬열인지, 경수인지, 오세훈인지, 우리 오빠인지 나는 알 겨를이 없었다. 제발 누구든지 내려가자고 말해주기를 나는 원하고 있었다. 아, 정말 미쳤다... 씨발, 도대체 밧줄이 어디있다는 거야?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 있다!



"야, 나 저거까지만 오를 거야. 저거 넘어도 백록담 안 보이면 너한테 업혀서 갈 거야."


"응, 업어줄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박찬열한테 정말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여서 업어달라는 미친 소리를 하긴 했지만, 박찬열 말대로 줄을 타고 올라가니 계단 몇 개만 걸어가고 바로 백록담 정상이 보였다. 씨발, 올라오자마자 얼마나 눈물이 줄줄 흐르던지. 집에 있는 오빠한테 전화를 해서 엉엉 울기만 했다. 학년부장 놈이 경치가 끝내준다고 했는데, 씨발 막상 올라와보니 그렇게 대단한 것도 없었다. 내가 이런 거 볼려고 여기까지 유체이탈을 경험하면서 올라오다니. 살짝 후회스러워서 운 것도 있었다. 





***





"oo야... 천천히 먹어. 소세지 더 줄까?"


"아니 아니, 내가 그냥 한그릇 더 받아올게!"



아, 무슨 밥이 왜 이렇게 꿀맛이지? 첫날 제주도에 도착해서 먹었던 밥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물론 메뉴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난 지금 너무 힘들어서 배에 뭐라도 다 쑤셔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짝꿍아, 근데 너 왜 장기자랑 할 때 안 내려왔어? 너 계속 찾고 있었는데."




"아... 아, 그게 말이지. 나 그때 잤어."


"엥? 너 그거 보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 이건 솔직히 말도 안되지. 한라산 등반하고 바로 장기자랑이라니, 이건 말도 안돼."



그래, 이건 다 사실이다. 아니, 정말 이건 말도 안되는 건 분명하다.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거의 영혼이 90% 쯤 빠져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을까. 이 말도 안되는 스케줄에 나는 거품 물고 쓰러졌다. 한라산 등반했다가 장기자랑이라는 이 미친 스케줄을 누가 감당하겠어? 그 덕분에 나는 부운 다리를 벽에 올린 채 땅바닥에서 그냥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지금은 장기자랑이 다 끝나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밥을 먹기 위해 눈을 뜬 거다. 



"짝꿍 너 없으니깐 다 재미없어 보였어."


"얼씨구, 어련하시겠어. 자, 이거 오늘 네가 나 도와줬으니까 주는 선물이야. 잘 쳐먹어."



딱히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새로 받아온 식판에 듬뿍 담겨있는 많은 소세지들 중 하나를 집어 박찬열 밥에 올려주었다. 근데 얘 왜 울먹이는 거지? 내가 소세지 주는 게 그렇게 감동적인 행동인가? 아, 물론 평소에 절대 아무 것도 주진 않았지만... 이 정도인가? 아무튼 나는 다짐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등산은 무조건 안한다고. 





***





이틀째 날에 한라산을 다녀와서 그런가, 나머지 셋째 넷째 날들은 뭐 아무 것도 보고 느낀 게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다가왔고. 집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타자마자 바로 뻗었다. 수학여행 출발 할 때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난리를 피웠던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나 말고도 모두가 다 조용했다. 그래, 안 힘든게 이상한 거지. 망할... 수학여행.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야, 너 갔다가 막노동 하고 왔어? 애가 완전 홀쭉해졌네."


"말도 마. 백록담 올라가다가 유체이탈 경험하고 왔으니까."


"오, 야 나 네 전화 받고 완전 깜짝 놀랐잖아. 네가 생전 안 하는 울면서 전화하기 까지 하고."


"아, 꺼져. 거기 올라가자마자 눈물 났다고. 오빤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마. 교훈 얻었어, 앞으로는 절대 등산 안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찾고 밖으로 나오는데 오빠가 가장 먼저 보였다. 우리 오빠가 그리운 적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들어보니 종인쌤은 학교에서 열수업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혜리랑 세훈이한테 연락을 해보니 얘네는 저녁이 되서야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이거 너한테 말 안했는데, 네가 질질 짜면서 나한테 전화했을 때 종인이 형이랑 현아 누나도 다 듣고 있었다?"


"...미친, 오빠 스피커폰 해놨었어?"


"야, 나 휴대폰 고장났잖아. 이어폰 꼽거나 스피커로 통화해야돼."


"아, 그러면 바꾸던가!! 아니면 이어폰 꼽던가! 오빠는 동생 망신 당하는 게 그렇게 좋냐?!"


"야, 다들 귀엽다고 했어. 물론 난 반대지만."


"꺼져! 이거나 들고와!"



아나, 젠장... 왜 종인쌤이랑 현아 언니까지 내 구슬픈 소리를 들어야만 했지? 그리고 왜 하필 우리 오빠 폰은 지금 이 타이밍에서 고장이 났을까. 내가 돈만 많았어도, 옛다! 하고 휴대폰 바꿔줬을텐데... 하하, 오빠 미안하다. 아니지, 내가 왜 미안하지? 결국 내가 질질 끌고 있던 캐리어를 오빠한테 맡기고 나는 재빨리 택시를 잡아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