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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 조각글] 그때의 우리 2

큥큥 뛰어다녀 2019. 6. 20. 13:52

그때의 우리

 

 

 

 

 

 

 

 

 

 

 

 

많이 고민 했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게 과연 옳은 걸까. 이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하는 것, 놓치는 것이 없을까 하고. 어쩌면 이 선택이 나를 조금 더 낫게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 자신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기에 바빴지. 

 

 

"내가 할 필요 없게 너무 잘했는데...?"

 

"아, 아니야. 네가 발표도 하는데, 자료조사까지 맡기기엔 미안해서 열심히 했어."

 

"ppt는 그래도 같이 만들지. 안 피곤했어?"

 

"괜찮아."

 

 

정말로 괜찮았다. 사귀었을 때 마음 고생한 것보다는 정말 힘들지 않았다. 문득, 사귈 적보다 왜 지금 나에게 말해주는 이 말 한마디가 더 가슴을 설레게 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나 마음을 다스리려고 수없이 시도를 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눈물이 날 뻔 했다. 난 그때도, 지금도 항상 바보 같기만 하다.

 

 

"그리고 대본도... 대충이지만 만들어봤는데,"

 

"아, 대본은 진짜 내가 해도 되는데... 고마워, 참고할게."

 

 

너무 드라마 같이 뻔한데, 대본을 건네주다 서로 손이 스쳤다. 이때 정말 자제력을 잃고 목놓아 엉엉 울 뻔 했다. 이런 설움을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변백현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 내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너무 힘든데,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막상 변백현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표정을 감추느라 바쁜 나와 달리, 정말 내가 건넨 대본에만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한줄 한줄 대본을 읽어가느라 바빠보였다. 다시 한번 느꼈다. 지금 나에게 하는 말들은 모두 형식적인 말 뿐이구나, 하고. 

 

 

 

 

***

 

 

 

 

"네가 대본도 잘 짜와서 수정할 건 거의 없었는데, 한번 읽어봐줘."

 

"응..."

 

 

자주 만났다. 조별 과제라는 핑계거리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수업이 많은 요일이라 지치고 힘들어서 집에 오자마자 뻗어서 자버리고 싶었는데, 시간 되냐고 묻는 변백현의 문자에, 바로 긍정의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도 보고 싶으니까. 

 

사실 대본의 글자들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대본의 글자들에게 있지만, 신경은 오직 대본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변백현에게 있으니. 아,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잘 적었네... 수고했어."

 

"너 안 읽은 것 같은데."

 

"어? 아, 아니야. 나 읽었어. 아, 여기 이 구절이 마음에 드네.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좋고, 싫음을 느끼는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그거 네가 적은 거잖아."

 

 

...할 말이 없었다. 하필 짚어도 내가 적은 구절이라니. 어쩐지 읽으면서도 익숙했다, 문장이. 차마 변백현의 말에 이제 대답을 못하겠어서 그냥 대본을 책상 위에 두고 가만히 있었다. 

 

"아, 맥주 마시고 싶네. 집에 맥주 있어?"

 

"맥주...?"

 

 

갑자기 맥주 얘기가 나와서 마침 냉장고에 있는 맥주 두 캔을 가지고 옥상에 올라왔다. 낮에는 흐려서 구름 밖에 안 보이다가, 밤이 되니 하늘이 맑아져 있었다. 술은 지독히 싫어해서 잘 마시지 않는데, 오늘 따라 맥주가 잘 넘어간다. 술을 마시자고 한 사람은 변백현인데 왜 내가 더 많이 마시는 것 같지.

 

 

"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엥? 야, 너 벌써 눈 풀렸어."

 

 

하긴... 술도 못하면서 맥주를 꿀꺽꿀꺽 잘도 넘겨댔으니... 이미 볼도 붉어진지 오래다. 이래서 내가 술이 싫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며 정면을 바라보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변백현은 풀린 내 눈을 보고 깜짝 놀랐나 보다. 근데 얘는 헤어져서 봐도 참 멋있다.

 

 

"너 아직 나 좋아하지."

 

"...아니."

 

"아니?"

 

"안 좋아하는데..."

 

 

ooo 진짜 희망고문 하냐? 어째 술을 마셔도 솔직하지 못하네. 취기가 더 필요한 건가 싶어 남은 맥주를 다 마셔버렸다. 한 캔 더 들고 올 걸 그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너 아직도 솔직하지 못하네. 내가 그때는 말 못했는데, 우리 사귈 때 나 너 엄청 좋아했어."

 

"어?"

 

"아, 아니지. 좋아했어 가 아니라, 좋아하고 있지. 지금도."

 

"근데 왜... 왜 헤어지자고 했는데? 나 좋아한다면서."

 

"네 작은 자존감 때문이랄까. 사귈 때도, 지금도 보면 넌 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 남은 그렇게 끔찍히도 아끼면서 왜 남들 보다 더 예쁜 네 자신을 안 사랑해줘?"

 

"...그건."

 

"그게 너무 짜증났어. 그래서 널 보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너한테 화를 표현해버렸지. 난 지금부터라도 네가 널 사랑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리고 나한테도 좀 솔직하게 표현하고."

 

 

처음 알게 된 사실들에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풀린 눈을 똑바로 뜨고 변백현을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사귈 때도 서로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변백현이 내 눈을 바라볼 때면 떨려서 바로 피해버렸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피하지 않았다. 아, 술 깬게 아닌 것 같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넌?"

 

"...나도 많이 좋아해."